명품 셀린느 CELINE
이 브랜드 하면 역시 블랙핑크의 리사를 빼놓을 수가 없죠. 이 브랜드의 글로벌 엠버서더로 활약하고 있잖아요. 이 분이 메고 나오는 여러 가지 작은 백 요새 엄청 많이 보이는데요. 그리고 작년에는 미국에서 BTS 멤버들이 이 브랜드의 재킷을 입었던 걸로도 유명하고요. 해외에선 ‘카니예 웨스트’가 이 브랜드의 여성복을 입었는데 멋있다고 화제가 됐었고 뭐 ‘트래비스 스캇’ 등등의 패비들도 있고요. 혹시 프랑스 파리하면 뭐가 떠올라요? 에펠탑? 센느강? 느트르담 성당? 메시와 네이마르? 근데 파리하면 개선문도 유명하잖아요. 그 개선문을 둘러싸고 있는 쇠사슬에서 이 브랜드의 로고 중 하나가 나왔죠. 근데 왜 *샤넬* 이든 *디올* 이든 주요 명품은 설립자가 유명하잖아요. 관련된 옛날이야기도 많고요. 근데 이 브랜드는 설립자 보다 오히려 그 뒤를 이은 사람들이 훨씬 유명해요. 특히 스스로 일을 놓고 쉬러 가도 팬덤이 애타게 기다린다는 디자이너 ‘피비 파일로’ 처럼요. 특유의 터틀넥 혹은 실크 셔츠 아디다스의 ‘스탠 스미스’ 신고 나오는 걸로도 유명한. 자 이번 주제는요. 트리오페, 캔버스, 클래식백, 풀코백으로 유명한 그리고 21세기 들어서 오히려 더욱 빛나는 디자이너들의 이름으로 장식된 세계 최대 명품제국 LVMH의 ‘CELINE 셀린느’입니다.
셀린느 창업자, 셀린느 비피아나 창업 스토리
예전에 셀린느가 블랙핑크 리사의 글로벌 엠버서더 선정을 발표하면서요, 흑백사진 몇 장을 공개했죠. 크레이티브 디렉터인 에디 슬리먼이 직접 사진을 찍었다는 이 분 관련된 논란은 뒷부분에서 말씀드리기로 하고요. 근데 참 블랙핑크 대단하죠? 샤넬에 디올에 생로랑에 셀린느까지. 근데 셀린느는 처음엔 아이들용 맞춤형 고급 신발 만드는 걸로 출발했어요. 아이들 신발을 고급소재로 편안하게. 1945년 프랑스 파리에서 셀린느 비피아나가 남편 리샤랑 같이 창업을 한 거죠. 아내는 디자인을 하고 남편은 영업을 하고 모나코 공국의 높은 분들도 단골이었다고 하고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아이들이 많이 태어나고 팍팍한 분위기가 풀리고 풍요로워지고 셀린느의 이 맞춤형 어린이용 신발이 잘 팔리면서 매장이 늘어갑니다. 근데 이 아이들용 맞춤형 신발이 너무 잘 팔리니까 이 재능을 이렇게만 써선 안 되겠다 해서 같은 가죽 제품들 중에 성인 여성용 신발도 만들고요 가방도 만들어요. 몇 번 없었던 인터뷰에서 셀린느 비피아나가 그랬어요. *여성을 위한 편안하고 실용적 제품을 만드는데 집중했다* 근데 뭔가 영역이 확장되면 통일성이 있어야 되니깐 브랜드를 나타내는 어떤 상징이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상징도 또 만들고 창업 10년쯤 뒤부터는 드디어 여성복을 출시합니다. 세련된 여성을 위한 고급 제품. 하지만 편안함을 추구했대요. 근데 왜 리사가 메고 있는 가방의 금색 버클, 지금도 왜 셀린느 핸드백이나 귀걸이, 목걸이, 팔찌 같은 데 보면 같은 문양이 있거든요. 이것도 셀린느의 상징이죠. 왜 셀린느 비피아나가 70년대 초반에 차를 타고 가는데 앞부분에서 말씀드린 개선문 주위를 지나는데 차가 고장 난 거예요. 그래서 내려가지고 이렇게 보는데 개선문을 둘러싸고 있는 쇠사슬이 보이더래요. 그 쇠사슬을 자세히 보면 이 문양이 있어요. 바로 여기에 착안한 거죠. 셀린느 비피아나가 항상 그랬대요. 왜 어린이용도 그렇고 여성용도 그렇고 신발을 만들다 보니깐 항상 거리에 모습을 눈여겨봤었대요. 시선을 신발에 있는 아래쪽으로 두다가 그 쇠사슬을 발견한 거겠죠. 이걸 두고 셀린느 비피아나가 그랬어요. *나는 항상 거리에서 모든 걸 찾아낸다* 이 시절에 셀린느 매장은 프랑스 곳곳으로 쭉 확장되고요. 프랑스 안에서는 패밀리 비즈니스로, 밖에서는 일종의 라이선스 사업식으로 해외 진출도 가속화합니다. 다른 어느 명품 브랜드들보다 먼저 아시아 시장에 공을 들였다고 하죠. 특히 일본에서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대요.
LVMH 그룹에 통합과 브랜드 성장
근데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 창업자 부부가 60대 중반에 이른 거예요. 점점 은퇴 생각이 나는 거죠. 근데 왜 다른 디자이너들 보면 70대에도 하고 뭐 죽을 때까지 일하던데?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요. 근데 왜 은퇴 생각을 했을까? 그 이유 중의 하나는요, 이 부부한테 아들이 있었는데. 이 아들이 전역에 매장이 한 90개 가까운 이 셀린느 브랜드의 가업을 안 잇고 싶어 하더래요. 아무튼 이런 사정이 있으니깐 어차리 물려줄 사람도 없는데 이 노부부 입장에서는 그만 고생하고 여생을 즐겨보자. 이런 상황에서 1987년, 이 노부부와 브랜드를 지켜보고 있던 한 남자가 거래를 제안합니다. 그게 누구였냐면, 훗날 명품제국의 황제가 되는 베르나르 아르노였어요. 작가 데이나 토마스에 따르면 디올을 인수하고 명품제국 건설 초입에 있던 아르노가 이 부부한테 그랬데요. 저한테 지분을 넘기시고 나서도 원할 때까지 계속 회사에서 일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지분 3분의 1을 넘겼는데, 한 석 달 만에 아르노의 부하 직원이 찾아와서 *할머니, 할아버지 저희가 필요하면 다시 부를게요.* 뭐 이랬대요. 이거 엄청 열받았을 거 아니에요. 야 이놈들아, 니들이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그 지분을 훨씬 비싸게 넘겼을 거야. 하지만 때는 이미 늦은 거였죠. 디올에 이어서 셀린느 등의 브랜드까지 손에 넣은 아르노는요, 루이비통과 모에 헤네시 간의 갈등에 개입해서 LVMH까지 장악하게 되죠. 그리고 이후 1996년 셀린느는 LVMH 그룹에 통합됩니다. 근데 주인이 바뀐 셀린느는요, 적어도 사업 측면에서는 해외 라이선스 사업을 정리하면서 브랜드 가치를 높였고요. 1997년에는 마이클 코어스를 디자인 책임자로 영입해서요. 여성 기성복, 액세서리,가방 등에 성과를 내면서 브랜드 위상을 높입니다. 근데 LVMH 에는 루이비통이랑 디올도 있잖아요. 이 마이클 코어스가 잘하는데, LVMH에서 자기한테 별로 관심이 없더래요. 그래서 2004년에 자기 브랜드를 한다고 이 셀린느를 떠납니다. 근데 오히려 셀린느는 점점 진짜 도약에 가까워지고 있었어요. 마이클 코어스가 떠나고 두 명의 디자이너의 짧은 임기를 거치고 한 4년 정도가 흘렀거든요. 2008년 셀린느가 끌로에의 디자인 책임자였던 피비 파일로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했기 때문이에요. 이후 스토리는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